1. 가슴시린 멜로 영화 '파이란'
시린 겨울감성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랜만에 떠오른 영화가 '파이란' 입니다. 겨울 배경은 아니지만 시리도록 아픈 감성이 겨울 바다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옵니다. 2001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2021년 11월에 20주년 기념으로 재개봉 했습니다. 12월에는 넷플릭스에도 공개되면서 다시금 회자되고 있습니다. <철도원>으로 잘 알려진 일본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러브레터>가 파이란의 원작입니다. 결말과 일부 설정을 제외하면 원작과 비슷한 구성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영화 <파이란>이 한국영화 중 최고의 비극으로 불리는 이유는 짜임새 있는 연출과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배우들의 명품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목 파이란은 여주인공 백란의 중국식 이름이며, 슬프고 안타까운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극중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하고 한번도 만나 적 없는 강재와 백란(파이란)이지만 서로를 마음에 품게 되는 과정이 참 애틋하고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특히 강재가 방파제에서 파이란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오열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명장면, 명연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수영이 부른 OST '스치듯 안녕'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 명품 연기
친구 경수와 함께 불법 비디오를 유통하며 한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삼류 건달 강재는 조직의 보스인 용식의 부탁으로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자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위장 결혼을 해준 서류상의 아내, 파이란이 죽었으니 장례를 치르라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수를 미루고 장례를 치르기 위해 파이란이 남긴 편지와 서류등을 통해 그녀를 알아갑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이모를 찾아 한국에 왔지만 이모는 이미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린 뒤였습니다. 불법체류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강재와 위장 결혼을 한 뒤 강원도의 작은 세탁소에서 세탁일을 하며 힘들게 지냅니다. 힘든 타지 생활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활짝 웃는 강재의 증명사진이었습니다. 서류상이지만 자신과 결혼해 준 강재에게 고마움을 느낀 파이란은 어느새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틈틈이 한글을 배우며 강재에게 편지를 쓰던 파이란은 중병에 걸리게 되고 마지막으로 강재를 만나기 위해 인천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날 강재가 불법 비디오 유통으로 잡혀가면서 만나지 못했고 파이란은 숨을 거두게 됩니다. 편지를 읽고 장례를 치르던 강재는 점차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마치 진짜 아내가 죽은 것 처럼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세탁소 주인아주머니로 부터 그녀의 편지 한통을 받은 강재는 자신에 대한 애정과 진심으로 가득한 내용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열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심경에 변화가 생깁니다. 이 영화 <파이란>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감정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홍콩의 신인배우 장백지의 담담한 연기가 좋았습니다. 순박하면서도 당찬 캐릭터를 잘 소화해 냈습니다. 그리고 믿고 보는 배우 최민식의 연기는 역시 최고였습니다. 강재라는 배역에 강렬하면서도 감성적인 연기로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막장 인생이지만 근본은 착하고 여린, 미워할 수 없는 삼류 건달을 너무 잘 표현했습니다. 극에 몰입도를 높여주었고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슬픔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연들의 리얼한 연기도 좋았습니다.
3. 인생의 전환
강재는 별볼일 없는 존재였지만 파이란은 그를 친절한 사람이라며 고마워 합니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씨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챦습니까?' 따뜻한 말한마디 들어본 적 없던 강재는 이 진심이 담긴 편지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돈 몇푼 받고 위장 결혼해 준 것 뿐이지만 본의 아닌 친절이 외로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었고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그녀의 따뜻한 애정과 감사의 편지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에게는 큰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잘 보여줍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던 강재는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막 살면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강재는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한 존재로 기억해 줬다는 사실에 잠깐이나마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포스터 사진을 보면 강재가 파이란을 업고 서로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음짓고 있습니다. 웃고 있지만 영화의 내용 때문에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입니다. 술집에서 쫓겨난 파이란이 세탁소에서 일하게 된다는 설정은 의도된 설정인 듯 합니다. 강재의 쓰레기 같은 삶을 세탁하고 새삶을 살게 해 준 것이 파이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한 여자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여자를 사랑한 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안타깝고 가슴 아픕니다. 강재는 파이란의 성숙한 사랑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사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강재는 파이란으로 인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다시 봐도 좋은 명작 멜로 영화 <파이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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